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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군 맹장 오동진 장군. 자료=국가보훈부
지난해 12월 초 충남 공주시 공산성 입구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펼쳐졌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 독립운동가 오동진 장군 80주기 추모문화제가 벌어진 것이다. 오동진장군추모회와 공주시민들이 주최한 이날 행사는 추모시 낭독과 진혼곡 공연, 천도재 봉행. 음복과 제사 등이 진행됐다. 오동진 장군은 공주 연체자무직자 형무소에서 해방을 불과 8개월여 앞두고 1944년 12월 1일 순국했다. 남한에 후손이 없어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치른 것이다.
일제 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을 벌인 장군은 최익현, 이강년,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 김홍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널리 알려졌지만 오동진 장군도 이에 못지 스마트금융계산기 않게 위대한 인물이다. 오동진은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1920년대 항일 무장 투쟁의 '3대 맹장'이라고 불렸다.
오동진장군추모회와 공주시민들이 지난해 12월 순국 80주기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 1919년 의주만 희망가득행복적금 세운동 주도, 중국 서간도로 망명
송암은 1889년 평안북도 의주(현재의 삭주군)에서 태어났다. 집 앞의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만주 서간도였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에 결혼을 했다. 1908년 평양의 대성학교에 입학했다. 대성학교는 안창호가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군인을 꿈꾸던 그는 이곳에서 군사교육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입학한 것이 ing자산운용 다. 대성학교 시절 오동진은 기독교를 믿게 된다. 1910년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학생 신분으로 예전에 유여대 목사가 설립했다가 폐교된 일신학교를 다시 세우게 된다.
대성학교 졸업 뒤 그는 고향에서 일신학교 교사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기독교 전파에도 나선다. 항일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국민회에도 참여하고, 이상룡 등과 함께 배 스마트폰 개통일 확인 달의숙을 세워 교사로 일했다.
30세인 1919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일신학교 설립자인 유여대 목사가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에 참여했고, 의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오동진은 유 목사의 권유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3월 16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주동자 10명이 체포됐지만 송암은 잡히지 않고 장사꾼 행세를 하면서 만세운동을 계속했으나 일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랴오닝시 단둥에 자리를 잡았다.
송암은 단둥에서 비밀결사조직 광제청년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국내외 연락을 위해 만든 연통기관의 안동(단둥)교통사무국에서 일했다. 오동진은 김응식과 함께 압록강변 8개 군(郡)의 참사를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지역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한청년단연합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만주와 국내를 돌며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 함양에 힘썼다. 청년단연합회 일원으로 군사교육을 하고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직접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서 폭탄과 무기를 구입, 단둥으로 싣고 왔다.
1920년 8월 임시정부는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 부대를 통합,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하고 6개의 군영을 뒀는데 이때 오동진은 제2영장(營長)을 맡았다. 남만주의 대한청년단연합회와 대한독립단 소속 군대를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총영(사령관 조맹선, 참모장 이탁)이 조직되자 송암은 총영장을 맡게 된다. 오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무기를 구입했다. 임시정부 광복군사령부는 인적 물적 기반이 취약했고, 실제는 오동진이 이끄는 대한광복군총영 위주로 작전이 이뤄졌다.
1939년 일제 경성형무소가 작성한 오동진장군 관련 문서. 자료=국가보훈부
오동진장군은 체포한 악질 친일형사 김덕기. 그는 애국지사를 1000여명을 체포했으며,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 남만주 광복군총영 지휘, 국내 오가며 무력투쟁
이 무렵부터 송암은 만주는 물론 국내를 무대로 유격전과 암살, 기관 폭파, 군자금 모금을 진행했다. 1920년 미국의 모리스 상원의원 일행이 경성(서울)에 온다는 정보를 접한 뒤 3개 부대를 국내에 파견했다. 안경신 부대는 안주경찰서에서 순사 2명을 사살하고,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정인복 부대는 신의주의 철도호텔과 선천경찰서, 선천군청에 폭탄을 던졌다. 오동진은 이때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배후로 지목돼 궐석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제의 추격 속에서도 압록강 일대 벽동, 삭주, 후창, 무산, 초산 등의 관공서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친일 밀정을 처단했다. 1922년 남만주 일대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자 교통부장과 군사부장 등으로 일하다가 의용군사령장 신팔균이 중국 군벌의 공격으로 사망하자 사령장도 겸하게 된다. 오동진은 3인조 암살단을 조직하여 여순조선인회 서기인 친일파 정갑주를 사살했고, 일진회의 친일파 최정규와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인 매국노 배정자 암살도 시도했다.
1925년 10월에는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국회)의 국무원으로 임명됐고, 26년 4월에는 고려혁명당에 참여하여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고려혁명당 총사령을 맡았다. 만주지방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농촌개발을 위해 정이형, 양기탁 등과 유한농업공사를 세우기도 했다.
일제는 신출귀몰하는 송암에게 현상금 10만원을 내걸었는데 요즘 10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1927년 12월 옛동지인 김종원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평안북도 삼성금광의 주인인 친일부호 최창학이 군자금을 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말을 믿고 김종원을 따라 나섰다가 길림성 장춘에서 친일 경찰 김덕기에게 체포된다.
송암은 6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1932년 6월 2심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상고를 포기해 무기형이 확정됐다. 송암은 재판이나 이송 과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일본놈의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나무랐다. 재판정에서 "나는 하나님의 지시로 세계평화를 위하여 조선독립군 사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등 독실한 기독교도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는 신의주형무소에서 33일, 경성형무소에서도 48일이나 옥중 단식을 벌였다. 어두운 징벌방에 100일이나 갇힌 뒤에 태연하게 걸어나오자 일본인 형무소장이 '가미사마(신)'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오동진 장군이 순국한 일제 당시 공주형무소. 사진=공주학아카이브
□ 관공서 143회 습격, 일제 경찰과 밀정 등 914명 처단
송암은 서울 마포의 경성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형무소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이 붙여져 1944년 공주형무소로 이감된다. 고문과 오랜 수형생할로 건강이 악화돼 12월 1일 5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일제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22년부터 1927년 체포되기까지 연인원 1만 4149명의 군대를 지휘하여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고, 일제 관리와 경찰 149명, 밀정과 친일 부호 765명 등 총 914명을 처단했다.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으며, 일제 경찰이나 관리, 친일 인사들이 가장 두려워했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시영, 이승만 등과 함께 1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33명 중의 한 분이고, 북한도 애국열사릉에 모셨다. 남북한이 모두 인정하는 독립운동가인 셈이다.
송암의 삶은 독립을 위한 투쟁과 투옥으로 점철돼 있다. 애국계몽과 교육, 사회운동을 벌이고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27년 일경에 체포된 뒤 죽을 때까지 17년간 감옥에서 보냈다. 무장 독립투쟁사에 이처럼 빛나는 전적을 남긴 인물이 드물다. 절대 약세의 군사력을 극복하기 위해 기습과 암살 등 비정규 전술을 능란하게 동원한 것도 군사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업적에 비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워" 오동진장군 책 펴낸 전병철 향토사학자
오동진 장군 관련 기록을 정리하여 책을 펴낸 전병철 향토사학자.
"송암 오동진 장군은 일제하 무장 독립투쟁사의 큰 별입니다. 업적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게 안타깝습니다. 공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순국하셨고, 그 인연으로 공주에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공주의 전병철 향토사학자는 3년여의 노력 끝에 광복군 사령관 오동진의 삶을 정리해냈다. 2019년부터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각종 자료와 일제 강점기 신문 등을 모아 100쪽 가까운 책을 펴낸 것이다.
"오동진장군과 관련된 자료라면 뭐든지 모으는데 초점을 뒀습니다. 각종 기록을 뒤지고 일일이 찾아다녔습니다. 이 자료를 토대로 학자들이 본격적인 논문을 써줬으면 합니다."
그는 "오 장군은 북한 출신인 데다 후손도 없어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명했다. 공주의 양동진, 김도석씨 등과 오동진장군추모회 결성도 추진하고 있다. 준비위원회 측은 지난해 12월 추모제 때 회원도 모집한 바 있다.
그는 역사교사 출신으로 퇴임 후 공주의 역사와 문화, 민속 등을 정리하는 향토사학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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